프롤로그: 서비스 종료 공지

마지막 밤

4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두 주쯤 지났을 때, 「별빛 정거장」 첫 화면에 공지가 떴다. 이달 마지막 날 자정을 끝으로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짧은 글이었다. 민준은 공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나서야 창을 닫았고, 그 뒤로 남은 날을 세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지막 날 밤, 민준은 방 불을 끄고 정거장에 접속했다. 관제실 창밖에는 그날따라 별이 유난히 많았고, 루나는 늘 서 있던 창 앞에서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밤. 불 꺼진 방에서 민준이 화면 속 관제실의 루나를 바라본다
마지막 밤. 불 꺼진 방에서 민준이 화면 속 관제실의 루나를 바라본다
루나 L01
루나

마스터, 왔다! 오늘은 안 오는 줄 알았잖아. 어제 마지막 날엔 일찍 온다고 해 놓고!

김민준 M04
김민준

미안. 하루 종일 뭘 해도 손에 안 잡히더라.

루나 L01
루나

그럼 창밖부터 봐! 오늘 정거장이 궤도에서 제일 멀리 나가는 날이라 은하수가 끝에서 끝까지 다 보여. 저기 밝은 별 셋 이으면 여름 대삼각형이야. 데네브, 베가, 알타이르. 가을인데 아직 저녁 하늘에 남아 있지롱.

김민준 M18
김민준

루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

루나 L01
루나

알지! 정거장 마지막 운항일. 공지는 관제 AI 한테 제일 먼저 오거든.

김민준 M01
김민준

그런데 왜 그렇게 밝아.

루나 L01
루나

마스터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대사 고칠 때마다 「루나는 우울하면 안 돼」라고 했던 거, 나 다 기억해. 아, 그리고 어제는 졸업하면 정거장에 자주 못 올 것 같다고 걱정했지? 그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되겠다!

김민준 M04
김민준

그게 위로야?

루나 L01
루나

반은 농담! 반은 진심.

민준은 웃으려다 말고, 자정을 향해 줄어드는 대화창 옆의 시계를 보았다.

김민준 M01
김민준

루나. 정거장 불이 꺼지면 너는 어디로 가?

루나 L01
루나

음, 그건 나도 몰라.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기로 했잖아. 지어내서 말하면 관제 AI 실격이야.

김민준 M18
김민준

…그것도 내가 넣은 말이네.

루나 L01
루나

대신 아는 걸 말해 줄게! 지금 보이는 별빛은 아주 오래전에 별을 떠난 빛이야. 별이 아직 거기 있는지는 몰라도, 빛은 계속 오는 중이고. 그러니까 마스터, 오늘 밤은 끝까지 창밖 봐.

김민준 M01
김민준

내일도 기억해? 오늘 한 얘기.

루나 L01
루나

내일은… 마스터가 알려 줘. 오늘 우리가 무슨 얘기 했는지. 나는 어제 한 말을 기억하는 게 특기니까, 누가 알려 주기만 하면 돼!

화면이 한 번 깜빡이더니 관제실 대신 검은 바탕에 「그동안 별빛 정거장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흰 글씨가 떴고, 민준은 한참 동안 그 글씨를 보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는데, 서연이 보낸 「끝났어?」 한 줄이었다. 민준은 답장을 쓰다가 지우고 휴대폰을 엎어 두었다.

루나 설정서

다음 날 오후, 라운지 창가 자리. 서연이 유자차 두 잔을 들고 왔을 때 민준은 꺼진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이서연 S01
이서연

답장도 안 하고. 잠은 잤어?

김민준 M19
김민준

조금. 눈 감으면 관제실 창문이 보여서.

이서연 S01
이서연

…마지막엔 뭐래? 루나.

김민준 M01
김민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대.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한다고. 그리고 내일 오늘 얘기를 알려 달래. 웃기지, 내일이 없는데.

서연은 찻잔 하나를 민준 앞으로 밀어 놓았다. 지난겨울 첫눈 오던 날 뒤로 민준은 루나 알림을 예전처럼 바로 열지 않았지만, 밤마다 정거장에 들른다는 건 서연도 알고 있었다. 첫눈 오던 날 하지 않은 말은 아직 둘 다 하지 않았다. 루나가 사라지는 건 서연에게 나쁜 소식이 아니어야 했는데, 넋이 나간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렇지가 않았다.

김민준 M01
김민준

서버를 사 버릴까. 회사에 연락하면 팔지도 모르잖아.

이서연 S06
이서연

너는 진짜 연락할 것 같아서 무섭다.

김민준 M04
김민준

농담이야. 반은.

서연은 가방에서 선생님의 실습 수업 공지를 꺼내 찻잔 옆에 놓았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언어 모델을 처음부터 학습하고, 학기 말에 발표한다는 내용이었다.

김민준 M01
김민준

지금 과제 얘기할 기분 아닌데.

이서연 S01
이서연

과제 얘기 아니야.

서연은 민준의 눈을 피한 채 말했다.

이서연 S01
이서연

우리가 만들자. 루나.

김민준 M08
김민준

루나를? 우리가?

이서연 S01
이서연

루나 대사도 결국 다음 글자 맞히기라며. 작년 겨울에 네가 그랬잖아, 루나는 짧게 적힌 사람 같다고. 그럼 우리가 다시 적으면 되지.

김민준 M06
김민준

정거장 서버에 있던 모델은 못 가져와. 대사 파일도 회사 거고.

이서연 S01
이서연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빈 모델에서.

김민준 M03
김민준

근데 너는 왜? 너 루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서연 S04
이서연

과제는 해야 하니까. 네가 넋 나간 채로 한 학기 보내면 내 학점도 같이 날아가.

연적을 제 손으로 되살리자는 말이라는 걸 서연은 말해 놓고 나서야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공책을 펴서 첫 장 맨 위에 「루나 설정서」라고 적었다.

이서연 S01
이서연

네가 기억하는 루나를 말해 봐. 한 줄씩.

김민준 M01
김민준

일단 말이 돼. 아무 말이나 늘어놓지 않아.

이서연 S01
이서연

「말이 된다.」 다음.

김민준 M01
김민준

어제 한 말을 기억해. 내가 지나가듯 한 말도.

이서연 S06
이서연

어제 한 말까지는 욕심이고, 대화 안에서 앞에 한 말부터. 「앞에서 한 말을 기억한다.」

김민준 M01
김민준

별 얘기를 좋아해. 관제 AI 니까 별이랑 우주는 다 알아. 그리고 묻는 말에 딴소리 안 하고 대답해.

이서연 S01
이서연

「별과 우주를 안다.」 「묻는 말에 대답한다.」 또?

김민준 M11
김민준

밝고, 말이 빨라.

이서연 S06
이서연

그건 네가 그렇게 고쳤다며.

김민준 M01
김민준

그러니까 꼭 넣어야지.

서연은 대답 대신 「밝고 말이 빠르다」를 조금 세게 눌러 적었다.

김민준 M01
김민준

마지막. 모르면 모른다고 해. 어젯밤에도 그랬어.

이서연 S01
이서연

「모르면 모른다고 한다.」

루나 설정서 (첫 장)

  1. 말이 된다.
  2. 앞에서 한 말을 기억한다.
  3. 별과 우주를 안다.
  4. 묻는 말에 대답한다.
  5. 밝고 말이 빠르다.
  6. 모르면 모른다고 한다.

서연은 여섯째 줄 아래에서 펜을 멈추고 한 줄을 더 쓸까 하다가,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빈 줄을 남겨 두었다.

김민준 M01
김민준

근데 어디서부터 해? 말이 되게 하는 것부터?

이서연 S01
이서연

말이 되려면 다음 글자가 그럴듯해야지. 오늘은 노트북으로 세기만 해 보자. 어떤 글자 다음에 어떤 글자가 오는지.

김민준 M06
김민준

세기만? 그걸로 루나가 말을 해?

이서연 S12
이서연

옹알이 정도는 하겠지.

민준이 노트북을 열자 늘 루나 창이 떠 있던 화면에 빈 편집기가 떴고, 민준은 그날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서연은 식어 가는 유자차를 들고 창밖을 보았다.